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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집사의 성경묵상/누가복음

누가복음 10장 - 진짜 중요한 건 뭘까요?

by fastcho 2026.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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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집사의 성경묵상: 누가복음 10장 - 진짜 중요한 건 뭘까요?

안녕하세요! '조집사의 성경묵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들여다볼 이야기는 누가복음 10장입니다. 언뜻 보면 그냥 2천 년 전의 종교 이야기 같지만, 조금만 자세히 뜯어보면 이건 뭐 거의 오늘날 우리들의 직장 생활, 골치 아픈 인간관계, 그리고 "나는 지금 뭘 위해 이렇게 바쁘게 사는가" 하는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한 소름 돋게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에피소드 모음집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10장에서는 크게 세 가지 사건이 펼쳐집니다.

  • 첫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인턴 파견, 그런데 빈손으로 가라고요? 예수님이 72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는,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 같은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둘째, '누가 내 이웃이죠?'라는 질문으로 선을 그으려다, 상상도 못 한 '빌런' 취급받던 사람에게 한 수 배우는 이야기. 한 똑똑한 율법 전문가가 예수님을 시험하려다, 오히려 자신의 편견과 위선이 탈탈 털리는 통쾌한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 셋째, 손님 접대하다가 폭발한 언니와 여유로운 동생의 갈등. 명절에 흔히 볼 수 있는 'K-장녀'의 분노와, 그 속에서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알려주는 예수님의 따끔한 한마디가 나옵니다.

자, 그럼 이 세 가지 에피소드가 어떻게 연결되고, 오늘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지 본격적으로 파헤쳐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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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론 1 - 72명의 파견: 맨땅에 헤딩, 그러나 가장 강력한 무기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12명의 핵심 제자 외에, 무려 72명의 제자를 추가로 파송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건 마치 잘나가던 스타트업이 시리즈 A 투자를 받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복음 전파의 '스케일업' 전략이 시작된 셈입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아주 파격적입니다.

누가복음 10장 4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아라."

말 그대로 '빈손 파송'입니다. 이건 단순히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이것은 전략입니다. 돈, 여벌 옷, 튼튼한 신발 같은 모든 인간적인 안전장치를 제거함으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의 자아와 자기의존성을 철저히 해체시키고 계십니다. 이 radical한 의존 상태는 그들을 교만으로부터 보호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담는 순수한 그릇으로 만듭니다. 이렇게 해야만 임무가 성공했을 때 그 영광이 자신들의 준비성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명백히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모두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3절)고 하십니다. 안전은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는 거죠. 사실 우리의 직장 생활이나 사회생활이 그렇지 않습니까? 수많은 경쟁과 갈등, 이해관계 속에서 우리는 때로 연약한 양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라고 요구하시면서, 가장 위험한 상황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믿음이 발휘되는 무대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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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본론 2 - 심판의 경고: 기회를 걷어찬 도시들의 최후

이렇게 파격적인 방식으로 파송된 제자들의 메시지는 모든 곳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메시지를 거부한 도시들을 향해 아주 냉철한 경고를 던지십니다. 이건 단순히 감정적인 저주가 아니라, 주어진 기회와 그에 따르는 책임에 대한 무서운 선언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 (12절)

누가복음 10장 13절과 15절입니다.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직접 방문해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던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차라리 이방 도시였던 '두로와 시돈'이 심판 날에 더 견디기 쉬울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바로 '더 많은 기회와 기적을 보고도 변화하지 않은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마치 혁신적인 신기술(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독점적 접근권을 가지고도, 너무 오만해서 자신들의 사업 모델(회개)을 바꾸길 거부한 거대 기업과 같습니다. 미래를 눈앞에서 직접 보고도 "우리 방식이 최고야"라며 기존의 전통과 자기의에 안주하다가, 결국 스스로의 퇴보와 몰락을 확정 지어버린 셈이죠.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들었던 만큼 그 책임은 더 무거워지는 법입니다. 기회를 놓친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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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본론 3 - 제자들의 귀환과 예수님의 기쁨: 진짜 '성과'는 무엇인가?

어두운 경고의 메시지와는 대조적으로, 파견되었던 72명의 제자들이 아주 신이 나서 돌아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하늘이 말하는 '성공'의 기준이 어떻게 다른지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흥분해서 이렇게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17절)

엄청난 성과입니다. 귀신을 제압하는 능력이라니, 대단한 '퍼포먼스'죠. 그런데 이 보고를 들은 예수님의 첫 반응이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흥분을 깎아내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의 경험이 얼마나 대단한 영적 실체인지를 확증해주십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18-19절)

예수님은 먼저 그들의 승리를 인정하고 축하해주십니다. "그래, 너희가 한 일이 바로 그거다! 너희는 지금 거대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거야!" 이렇게 그들의 사역에 권위를 부여하신 후에야, 진짜 핵심 교훈을 던지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0절)

이것이 바로 영적 리더십의 정수입니다. 승리는 축하하되, 기쁨의 근원은 다른 곳에 두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능력'과 '성과'에 열광했지만,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와 '소속'에 기쁨의 닻을 내리라고 가르치십니다. 네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가 진짜 기쁨의 근원이라는 것이죠. 우리의 만족은 '좋아요' 숫자나 통장 잔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와야 한다는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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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본론 4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질문을 뒤엎는 예수님의 클라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묻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25절).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되받아치십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기가 뭔가 아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29절)

이 질문의 속내는 이것입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를 명확하게 규정해주세요. 어디까지가 내 책임이고, 어디부터는 내 책임이 아닙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비유 중 하나인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져 있는데,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그냥 지나칩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던 '사마리아 사람'이 나타나 그를 정성껏 돌봐줍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단순한 이방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순수한 신앙을 이방 풍습과 섞어 더럽힌 '종교적 혼혈아', 즉 이단이자 상종 못 할 부정한 자들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깊은 민족적, 종교적 혐오감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을 영웅으로 설정한 것은 그야말로 핵폭탄급 도발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의 핵심 반전이 나옵니다. 이야기를 마친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6절)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질문, 즉 "누가 이웃입니까? (Who is my neighbor?)"를 완벽하게 뒤집어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Who acted as a neighbor?)"로 바꾸셨습니다. 이웃의 자격을 머리로 '규정'하고 선을 그으려던 시도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가 '이웃이 되어주는' 행동으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아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예수님의 천재적인 답변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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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본론 5 - 마르다와 마리아: K-장녀 마르다의 분주함과 진짜 중요한 한 가지

이웃 사랑이 '행동'이라면, 우리는 무조건 바쁘게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누가복음 10장의 마지막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듭니다. 이 이야기는 '좋은 일'에 분주하느라 '더 좋은 것'을 놓치는 우리 모두의 딜레마를 다룹니다. 특히 '열심'과 '분주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죠.

예수님이 한 마을에 방문하시자, 마르다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십니다. 언니 마르다는 손님 대접을 위해 정신없이 바쁜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만 있습니다. 결국 폭발한 마르다가 예수님께 불평합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40절)

이건 단순한 하소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한 직접적인 명령입니다. "가서 내 동생에게 지시하세요." 이것이 바로 불안에서 비롯된 섬김의 위험성입니다. 섬김의 목적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통제하고 다른 사람을 내 기준에 맞춰 판단하는 도구로 변질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마르다의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41-42절)

예수님은 마르다의 '섬김'이라는 좋은 행동 자체를 비난하신 게 아닙니다. 그 행동의 동기가 된 '염려와 분주한 마음'을 지적하신 겁니다. 마치 번아웃에 시달리는 열정적인 직장인처럼, 마르다는 중요한 손님을 대접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정작 가장 중요한 손님 자체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what is better)'이란,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되는 본질, 즉 예수님과의 관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에 먼저 집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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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클로징: 그래서, 누가복음 10장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자, 이렇게 누가복음 10장의 대장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 72명의 파송, 회개하지 않는 도시, 진짜 기쁨의 기준, 선한 사마리아인,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 전혀 다른 것 같은 이 이야기들은 사실 하나의 거대한 메시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은 우리에게 발이 달린 믿음을 요구합니다. 파송된 제자들처럼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길을 건너가 행동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경고합니다. 올바른 본질에 뿌리내리지 않은 발은 그저 불안한 방황으로 끝날 뿐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마리아의 선택처럼 주님께 집중하는 것에서부터 흘러나와야 하며, 우리의 기쁨은 제자들이 배운 것처럼 성과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함'은 우리의 '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누가복음 10장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애쓰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열심이 방향을 잃은 분주함이 되지 않기를, 우리의 사랑이 경계선을 긋는 얄팍한 계산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조집사의 성경묵상'이었습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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