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집사의 성경묵상: 누가복음 13장 - 실적 압박과 마지막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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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오프닝: "오늘 사고 안 나셨죠? 그게 은혜입니다."
'조집사의 성경묵상'입니다. 혹시 오늘 아침에 뉴스 보셨나요? 세상에 사건 사고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꼭 '저 사람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런 끔찍한 일을 당할까?'라고 수군거리죠.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평소 행실이 문제야." 하면서 남의 불행을 팝콘 삼아 씹으며 자신의 안도감을 확인하는 이상한 심리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건 2천 년 전에도 똑같았습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3장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아주 자극적인 뉴스를 전합니다.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제물에 섞어버린 끔찍한 사건이었죠. 사람들은 아마 "예수님, 이 사람들 정말 천벌받은 거 맞죠?" 하는 기대를 품고 물었을 겁니다. 바로 뒤이어 실로암 탑이 무너져 18명이 압사한 사건까지 언급되는 걸 보면, 당시 사람들도 '가십'과 '남의 불행'에 대한 관심이 지금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방송의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재난과 죄의 상관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명쾌한 팩트체크'. 과연 불행은 죄의 성적표일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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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충격! 재난과 죄의 상관관계? 예수님의 명쾌한 팩트체크 (1-5절)
우리는 왜 타인의 불행을 보며 그 사람의 도덕적 결함을 찾으려 할까요? 그건 어쩌면 세상을 예측 가능하고 공정한 곳으로 믿고 싶은 본능 때문일지 모릅니다. '착하게 살면 복 받고, 악하게 살면 벌 받는다'는 공식이 작동해야 내 삶이 안전하다고 느끼니까요. 하지만 이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내가 겪는 작은 불행은 '시련'이고, 남이 겪는 큰 불행은 '심판'이라고 여기는, 남을 깎아내리며 스스로를 높이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죠.
예수님께 빌라도의 학살 소식을 전한 사람들은 마치 특종을 물어온 기자나 자극적인 이슈를 퍼뜨리는 유튜버 같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호기심과 함께, '저들은 큰 죄인 맞죠?'라는 은근한 동의를 구하는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짜놓은 프레임에 조금도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카운터펀치를 날리시죠. "이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한마디로 '불행 = 죄의 크기'라는 공식을 단칼에 깨부수시는 겁니다. 이어서 실로암 탑 붕괴 사건까지 언급하며 "그럼 이 죽은 18명은 예루살렘의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악질이라서 죽었겠느냐?"라고 확인사살까지 하십니다.
그러면서 진짜 핵심 메시지를 던지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이건 저주가 아닙니다. 무서운 경고죠. 예수님의 관점은 이것입니다. '진짜 위험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무작위 재난이 아니다. 진짜 위험은 그런 재난을 보고도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지 않는 너희의 완고함, 바로 회개하지 않는 그 상태다.'
결국 예수님은 사람들의 시선을 외부의 '사건'에서 각자의 '내면'으로 돌려놓으신 겁니다. 남의 불행을 구경하며 손가락질할 시간이 없다는 거죠. 이제 이야기는 재난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기회'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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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년차 무화과나무의 눈물: 실적 압박과 마지막 기회 (6-9절)
하나님에게는 두 가지 속성이 공존합니다. 모든 것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심판하시는 냉철함, 그리고 어떻게든 한 번 더 기회를 주려는 끝없는 자비. 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비유가 있을까요? 바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를 현대 직장 생활에 빗대면 아주 기가 막히게 들어맞습니다.
- 포도원 주인: 3년이나 기다렸는데 성과가 없자 구조조정을 결심한 성급한 CEO입니다.
- 무화과나무: 입사 3년 차인데 이렇다 할 실적이 없어 해고 위기에 놓인 직원이죠.
- 포도원지기: 어떻게든 부하 직원을 살려보려는, 인간미 넘치는 팀장님입니다.
CEO인 주인의 말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자본주의적입니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이건 명백한 '자원 낭비'에 대한 지적입니다. 월급은 나가는데 아웃풋은 없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회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정리 대상 1순위입니다. 감정의 여지가 없는, ROI(투자 대비 수익) 관점의 냉정한 판단이죠.
이때 팀장인 포도원지기가 나섭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이건 단순한 감정적 호소가 아닙니다. "제가 책임지고 집중 관리해서 성과를 내보겠습니다"라는 구체적인 솔루션을 제시하는 겁니다. 마지막 기회, 즉 '유예기간(Probation)'을 요청하면서 '특별 관리 프로그램(거름 주기)'을 약속하는 거죠.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원칙대로라면 당장 잘려나가야 마땅하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심지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특별한 영양분까지 공급해 주시는 사랑.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냉정한 현실과, '그 기회를 한 번 더 주려는 사랑'이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열매 맺지 못하는 상태, 즉 무언가에 꽁꽁 '묶여있는 상태'에서 풀려나는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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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18년 만에 편 허리: 안식일, 쉼인가? 족쇄인가? (10-17절)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만든 규칙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본질을 잃고 사람을 억압하는 도구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제도도 예외는 아니죠. 안식일 규정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에게 쉼과 회복을 주려던 날이,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족쇄가 되어버린 겁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18년 동안 허리가 굽어 조금도 몸을 펴지 못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18년이면 강산이 거의 두 번 변할 시간입니다. 그녀의 고통은 일상이 되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보시자마자 지체 없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손을 얹으시니 여자는 즉시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18년의 고통이 단 한순간에 끝난 극적인 장면이죠.
그런데 이 감동적인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회당장입니다. 그는 분개해서 무리를 향해 소리칩니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나 있으니, 그날에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마치 응급 환자에게 "진료는 평일에 받으세요. 여긴 주말이라 접수 마감입니다"라고 말하는 융통성 없는 행정가 같습니다. 그의 분노는 표면적으로는 안식일 규정을 지키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다릅니다. 자신의 회당에서, 자신의 허락도 없이 기적을 행하며 인기를 끄는 예수에 대한 시기심, 그리고 기존 질서를 흔드는 것에 대한 분노가 그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반박은 그야말로 사이다입니다. "너희 위선자들아!" 이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하시죠. "너희는 안식일에도 자기 재산인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 물을 먹이러 가지 않느냐? 그런데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여기서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아주 명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십니다.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이 여인에게 '당신은 이 공동체의 핵심 멤버다'라고 선포하신 거죠. 너희는 고작 재산 목록 1호인 소나 나귀의 갈증은 챙기면서, 이 존귀한 '아브라함의 딸'이 18년간 겪은 고통은 외면하느냐? 이 프레임 전환 앞에서 회당장의 논리는 박살이 나버립니다.
결과는 통쾌했습니다. 반대자들은 모두 부끄러워했고, 무리는 기뻐했습니다. 진리가 위선을 이기는 순간이었죠. 이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극적인 변화는 과연 어떻게 시작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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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겨자씨와 누룩: 하나님 나라는 '존버'가 답이다? (18-21절)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크고 화려한 것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세상을 바꾸는 힘은 종종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이 거대한 개념을 설명하시기 위해, 당시 사람들이 가장 하찮게 여겼을 법한 두 가지, 겨자씨와 누룩을 비유로 드셨습니다.
이 비유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요? 사람들은 메시아의 나라가 로마제국을 뒤엎는 거대한 군사작전처럼, 사자처럼 포효하며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작 겨자씨, 보이지도 않는 누룩을 이야기하십니다. 이건 '힘'에 대한 재정의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압도적인 무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판을 바꾸는 서브버전(subversion), 즉 전복이라는 거죠.
먼저 겨자씨 비유입니다. 이건 마치 '벤처 캐피탈의 시드 투자' 와 같습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 중 하나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작아서 이게 과연 자라긴 할까, 아무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죠. 땅에 심기면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 공중의 새들이 깃드는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를 만들어냅니다.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다는 겁니다.
다음은 누룩 비유입니다. 이건 '바이럴 마케팅' 이나 '밈(meme)의 확산' 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 여인이 아주 소량의 누룩을 가루 서 말(엄청난 양입니다) 속에 섞어 넣습니다. 누룩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반죽 전체에 퍼져나가 마침내 온 덩어리를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 시스템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방식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결국 세상 전체를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두 비유를 종합하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명확해집니다. '작은 시작, 보이지 않는 과정, 그러나 거대하고 완전한 결과.' 어쩌면 한국의 젊은 세대가 쓰는 '존버(끝까지 버티면 이긴다)'라는 말이 이 비유의 메시지를 가장 잘 담아내는 단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앞의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 작은 시작의 잠재력을 믿고 인내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자, 이렇게 성장하는 하나님 나라에 과연 우리는 어떻게 '입장'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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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천국행 '인서울' 경쟁률: 좁은 문은 대체 뭔가? (22-30절)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이 질문 속에는 '내가 저 커트라인 안에 들 수 있을까? 혹시 나만 떨어지는 거 아냐?' 하는 본능적인 불안감과 경쟁심리가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한 숫자를 넘어 구원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으로 향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이건 마치 대한민국의 치열한 '인서울 대학 입시' 나 '대기업 공채' 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무나 설렁설렁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는 거죠. 남들 다 가는 넓고 편한 길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집중하고 애써야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는 겁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문이 한번 닫힌 후에는, 밖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리며 변명해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이들의 항변은 마치 유명인과 밥 한번 먹고 SNS에 인증샷 올린 뒤, 그 사람과 절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같습니다. 피상적인 관계, 스쳐 지나간 인연, 얄팍한 스펙만으로는 통과할 수 없다는 거죠.
주인의 대답은 냉정합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신앙은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knowing about)'이 아니라,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knowing)'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기서 진짜 핵폭탄을 터뜨리십니다. 주인이 말하죠.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런데 너희가 쫓겨난 그 잔치 자리에는, 동쪽, 서쪽, 남쪽, 북쪽, 온 세상에서 온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아있을 것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입시로 치면, 대치동 키즈들은 다 떨어지고 저기 아마존 오지나 시베리아 벌판에서 온 학생들이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소리입니다. 혈통, 스펙, 배경으로 당연히 합격권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은 쫓겨나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아웃사이더들이 주인공이 되는 대역전극이 벌어진다는 선언입니다.
이 충격적인 그림을 보여주신 뒤에야 비로소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는 말씀이 진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건 그냥 좋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벌어질 살벌한 순위 뒤집기에 대한 예고편인 셈이죠.
이처럼 세상의 기준을 정면으로 거부하시는 예수님께 어떤 위협이 닥쳐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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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여우에게 보내는 경고와 어미 닭의 슬픔 (31-35절)
예수님의 여정은 이제 모든 갈등의 정점인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단락은 임박한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담대한 태도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예루살렘을 향한 복잡하고 애끓는 감정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 경고합니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이 경고가 과연 예수님을 위한 진정한 걱정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신들의 구역에서 골치 아픈 예수를 조용히 내보내려는 교묘한 계략이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통해 헤롯에게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여라." 당시 최고 권력자인 헤롯을 '사자'가 아닌, 교활하고 비열한 '여우'라고 칭하신 겁니다. 이 한마디로 예수님은 헤롯의 권위를 깎아내리고, 자신은 그의 위협 따위에 굴하지 않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술 더 뜹니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그냥 용감한 발언이 아닙니다. 자신의 죽음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것임을 아는, 비극적 운명을 향해 정면으로 걸어 들어가는 선지자의 선언입니다. 그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운명의 중심부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곧이어, 자신의 죽음의 장소가 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깊은 슬픔이 터져 나옵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 애절한 비유가 있을까요?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어미의 품이라는 이미지와, 그것을 거부하는 자녀의 차가운 거절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이것은 수없이 예언자들을 보내며 이스라엘을 품으려 했던 하나님의 애끓는 사랑과, 그것을 끝끝내 외면했던 인간의 완고함을 보여주는 눈물겨운 탄식입니다.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이 무서운 예언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라고 고백하게 될 때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의 여지를 남기며 누가복음 13장은 끝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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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클로징: 오늘, 당신의 무화과나무에는 거름이 뿌려졌다
누가복음 13장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말해줍니다. 첫째, 나의 평안함과 안녕이 내가 남보다 더 의롭기 때문이라는 교만한 착각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둘째, 우리 모두는 언제 잘릴지 모르는, 그러나 열매 맺도록 마지막 기회를 부여받은 무화과나무와 같다고 말합니다. 셋째, 죽어가는 규칙보다 살아있는 사람이 먼저이며, 긍휼이야말로 모든 율법의 완성임을 보여줍니다. 넷째,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압도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임을 약속합니다.
오늘 시청자 여러분의 삶이라는 포도원에도, 하나님이라는 포도원지기가 거름을 주고 김을 매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잠든 사이에, 여러분이 일하는 동안에, 어쩌면 성급한 주인에게 "올해만 그냥 넘어가 주십시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무사히 눈을 뜨고 숨을 쉬는 하루가 바로 그 '마지막 기회'의 증거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이 각자의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할지 고민하고, 그 열매를 맺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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