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이 "일하기만 하는" 경제에서 탈출해야 하는 이유, 한국도 남의 일 아니다
일본 닛케이 신문에서 최근 연속으로 실은 경제학자들의 칼럼이 화제다. 제목만 봐도 심상치 않다. '공급력을 높이려면'이라는 시리즈인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일본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드러난다. 요약하면 이렇다: 일본은 지난 30년간 노동자들을 혹사시키면서도 정작 필요한 투자는 제대로 하지 않아왔다는 것이다.
일본의 진짜 문제: 일 많고 돈 안 버는 경제 구조
학습원대학의 미야가와 츠토무 교수가 지적한 핵심은 놀랍다. 일본의 노동 생산성이 미국, 독일과 비교할 때 얼마나 처참한지를 그래프로 보여준 것이다. 2000년을 기준 100으로 설정했을 때, 자본 집약도(즉, 노동자 1명당 기계·설비 투자액)를 비교하면, 일본은 미국과 독일과 달리 오른쪽으로 치솟지 않는다. 쉽게 말해 일본 기업들은 로봇에 투자하지 말고 사람을 더 고용해서 일 시켰다는 뜻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기업들이 과잉자본을 정리해야 했고, 2008년 금융위기 때도 다른 선진국보다 일본 기업들이 고용을 더 지켰기 때문이다. 직원을 자르지 않는 대신, 기계에는 투자하지 않았다.
일경 기사에서 더 자극적인 표현을 쓰면, 일본 노동자들은 "일해서, 또 일해서, 또 일해서" 왔다는 것이다. 마치 현대판 과로사 문화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나?
트럼프 관세 대란, 일본의 재정 적자 함정
여기서 흥미로운 반전이 나온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일본 기업들은 대외직접투자(해외 진출)에 집중했다. 투자 규모가 대내직접투자(국내 진출)의 10배 정도였다. 왜? 엔고 때문에 국내 투자보다 동남아시아나 중남미를 경유해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5년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의 관세 정책이 일본 기업의 이런 판단을 완전히 뒤집어놨다. 이제는 동남아시아 경유 수출도 日本 직수출과 별 다를 게 없어졌다는 뜻이다. 미야가와 교수는 "일본은 대외직접투자를 재검토하고 대내직접투자를 촉진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한국도 주목해야 할 신호다. 한국 기업들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AI와 로봇의 양날의 검: 단기 생산성 vs. 장기 인재 고갈
일본대학의 안도 무네토모 교수는 더 흥미로운 지적을 한다. 로봇과 AI 도입이 단기적으로는 생산성을 높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사람 육성 과정 자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경고다.
구체적으로, 미국의 어느 연구에서 생성 AI를 고객지원팀에 단계적으로 도입한 결과, 시간당 처리량이 평균 14% 증가했다. 여기서 놀라운 건, 신입이나 저스킬층일수록 34% 정도의 대폭적인 개선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게 좋은 소식 같지만, 뒤집으면 악몽이다. AI가 경험 많은 선배의 노하우를 자동으로 후배에게 전수해주니까, 신입은 "자기 머리로 생각해보고 실패해서 배우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단기적으로는 생산성이 올라가지만, 10년 뒤에는 회사를 이끌 중견 인재가 사라져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건, 스탠포드대의 어떤 교수가 제시한 개념인 "하단 디딤돌 상실(일본식으로는 'はしごの下段の喪失')"이다. 젊은이들이 밟고 올라가야 할 초급 업무가 로봇에게 빼앗기면, 미드 스킬에 도달할 기회 자체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제조업과 화이트칼라 양쪽 모두에 해당한다.
일본 기업들의 투자 의욕 부진, 경제 쇠퇴의 신호?
일橋대학의 카가야 테츠유키 교수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2014년과 2024년을 비교했을 때, 시가총액 1000억 엔 이상 기업 중 미국 기업의 장기투자 비율은 **42.9%**에 달했지만, 일본 기업은 겨우 **16.8%**에 그쳤다는 것이다. 유럽도 25.5%인데 말이다.
왜 일본 기업들은 투자를 안 할까? 30년간의 데플레이션 경제에 찌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교수는 지적한다. 일본은 원가에 일정한 이윤을 더하는 마크업형 가격결정에 익숙해져 있다. 즉, 비용이 올라가면 가격도 올리는 식이다. 반면 자신이 만드는 부가가치에 맞는 가격을 받는 마인드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국 기업들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한국 기업들도 비슷한 수준의 장기투자 비율을 기록하고 있지 않나? 특히 제조업 중심의 한국 기업들이 기술혁신과 신사업 개발에 충분히 투자하고 있나?
일본 기업의 수익성도 문제: 미국, 유럽에 밀린 일본
더 암울한 수치가 있다. **24년 일본 기업의 매출액순이익률은 31.7%**인데, 유럽은 44.5%, 미국은 **52.6%**라는 것이다. 같은 매출을 올려도 일본은 절반 이상의 이윤만 남긴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본 기업들이 얼마나 약한 협상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공급망상 약자 위치에 있거나, 가격 인상에 약하거나, 혹은 고객들에게 프리미엄을 받지 못하는 저부가가치 사업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의 굴지의 기업들이 정말 세계적 수준의 이윤율을 기록하고 있을까?
개인적 평가: 한국도 "일하는 경제"에서 깨어나야 한다
닛케이 시리즈가 지적한 일본의 문제는 사실 한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도 지난 수십 년간 저가 전략과 장시간 노동으로 성장해왔다. 1990년대, 2000년대 한국의 기업들도 "우리는 싼 것으로 승부한다"는 전략을 취해왔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한국의 인건비도 올라갔고, 기술 차이도 줄어들었으며, 중국 같은 저가 국가들의 추격도 심하다. 한국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기술 혁신과 부가가치 제품으로의 전환이고, 다른 하나는 자동화와 생산성 향상이다.
닛케이의 논평에서 흥미로운 건, 이것들이 모두 장기 투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단기 이익을 노리는 경영자나, 분기별 실적에 목매는 주주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30년 뒤 일본처럼 된다.
한국 기업 임원진과 투자자들이 읽어야 할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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