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엔, "금리인상 쇼"는 막혔는데 엔저는 계속? 일본은행, "예단 없다"는 말 이면의 심각한 고민
"내년까지 금리 안 올린다"고 결정한 일본, 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이유
일본은행이 또 했다. 지난 10월 금융정책결정회합에서 정책금리를 0.5%로 동결한 것이다. 시장은 금리인상을 기대했는데, 식은 밥 같은 결정에 엔화는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기대했던 콘서트 티켓을 들었는데 공연이 연기된 격이다. 근데 여기가 재미있는 부분이다. 금리를 안 올리기로 했는데 엔화가 자꾸 약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일본은행의 우에다 가즈오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현시점에서 예단을 가지지 않는다"며, "내년 봄 노사 협상의 초기 모멘텀을 파악하고 싶다"고 말했다. 번역하자면, "아직 뭐할지 못 정했고, 돈 버는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봐야겠다"는 뜻이다. 정치인의 말 같다. 아니, 정치인도 이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이게 시장에 "금리 안 올린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자 엔화가 한없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국내외 금융기관들이 잇따라 엔화 약세 시나리오로 예측을 수정했다. JP모건 체이스는 올해 말 예측을 142엔에서 156엔으로 무려 14엔이나 절상했다. 그리고 삼지철 은행, 미쓰이주택 은행도 따라왔다. 이건 "우리는 엔화 약해질 거 본다"는 신호인데, 은행권이 이렇게 나가면 실제로 엔화는 약해진다.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현재 엔/달러 환율은 154엔대. 2월 이후 가장 약한 수준이다. 10월 한 달에만 엔화가 7엔 이상 급락했다. 다른 통화 대비 낙폭이 4%를 넘는다. 왜 이런 일이? 크게 두 가지 이유다.
첫째, 금리인상 기대가 증발했다. 이미 10월 29일에는 12월 금리인상 확률이 68.2%였는데, 10일에는 56%로 내려앉았다. 단 나흘 사이에 12%포인트가 떨어진 것이다. 이는 일본은행의 "침묵의 경고"가 시장에 얼마나 큰 신호를 줬는지 보여준다. 금리가 안 오르면 엔화 매력이 떨어진다. 금리가 높을수록 그 통화를 보유했을 때 수익이 크니까. 미국은 금리를 내리고 있고, 일본은 올리지 않으니 엔화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교과서적인 환율 논리다.
둘째,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적극 재정정책"이 기름을 붓고 있다. 새로 들어선 다카이치 총리는 "책임 있는 적극 재정"이라는 기조 아래 물가 대응을 위한 경제대책을 11월 말에 발표할 예정이고, 25년도 보정예산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수준을 훨씬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은행권에서는 "다카이치 정권은 엔화를 떨어뜨리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여기서 한국 분들이 알아야 할 부분이다. 일본의 엔화 약세는 곧 한국의 원화 약세를 의미한다. 한국 원화도 달러 대비 약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과 한국 모두 금리인상 기대가 약해지고 있다. 양국 모두 수출 경쟁에서 약통화의 이점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약통화는 수입 물가를 올린다. 일본은 에너지와 식료품을 수입에 의존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엔화와 원화가 약해지면 이런 필수 수입재의 가격이 올라간다. 결국 국민의 주머니가 가볍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미스터리가 생긴다. 12월 일본은행 금리인상 확률이 56%까지 떨어졌는데, 일부 위원들은 여전히 "금리인상이 적절하다", "조기 인상이 좋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마치 배에서 내려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도 있는데, 배는 계속 나가는 상황이다. 다카타 창 심의위원과 타무라 나오키 심의위원은 정책금리를 0.75%로 올리자고 제안했지만, 다수결에 밀려 부결됐다. 이는 일본은행 내부에도 심각한 의견 불일치가 있다는 뜻이다.
더 재미있는 부분은 기대효과(expectation effect) 논쟁이다. 일본은행이 "금리 안 올린다"고 하면, 시장은 "아, 당분간 엔화 약할 거네"라고 판단한다. 그럼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산다. 엔화가 약해진다. 이건 마치 의사가 "당신은 회복 안 될 거다"라고 하면 환자의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 통화정책의 신뢰성이 떨어지면, 그 정책의 효과도 함께 떨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변수가 하나 있다. 일본 정부가 환율 개입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닛케이통화인덱스(일본 엔화의 실질 실효환율)가 71.4로 떨어졌는데, 이는 지난해 7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지난해 7월에는 일본 정부가 대대적으로 환율 개입을 했었다. 시장은 이제 정부 개입이 언제 나올지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너프를 기다리는 게임 유저처럼.
씨티그룹 증권의 다카시마 오사무 통화 전략가는 오히려 "엔화가 올라갈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주식시장의 고점 조정이 진행되면, 그동안 떨어진 엔화가 다시 올라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올해 말 환율을 147엔대로 예측했다. 이미 내려갔던 것이 다시 올라온다면, 엔화 보유자는 큰 손실을 보게 된다.
결국 문제는 일본은행의 불일치하는 신호다. 위원들은 "금리인상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총재는 "예단 없다"고 했다. 이게 시장의 확신을 빼앗았다. 또한 고시 정권의 재정정책 신호가 명확하지 않다. 정부가 정말로 엔저를 용인하는지, 아니면 나중에 개입할 계획인지 알 수 없다. 이런 불확실성이 환율을 좌우하게 된다.
한국 투자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일단 엔화 약세는 일본 수출품이 싸진다는 뜻이다. 한국 수출업체들과는 경쟁이 심해질 수 있다. 반대로 일본 여행을 계획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호텔, 음식, 쇼핑이 모두 싸진다. 그런데 더 중요한 부분은 심리다. 일본 정책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는 아시아 금융시장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개인적 평가다. 일본은행이 당장은 금리를 올리지 않겠지만, 봄 노사 협상 이후에는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가가 계속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 금리를 안 올렸다는 신호가 이미 너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마치 "금리 정상화 연기 선언"을 한 셈이다. 결국 일본은 엔저 상황에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엔저는 일본 경제의 새로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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