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독약 조항' 함정──동남아는 중국 대신 미국에 '항복'해야 하나?
충성심 테스트를 강요하는 무역협정의 정체
요즘 미국이 동남아 국가들과 무역협정을 체결할 때 몰래 집어넣는 조항이 있습니다. 일명 '독약 조항(Poison Pill)'이라고 부르는 악명 높은 이것 말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말레이시아가 미국에 '불리한 국가'와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면, 미국이 일방적으로 협정을 파기할 수 있다는 조항입니다. 협정 본문에는 구체적인 국가명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중국을 겨냥한 것입니다.
10월 트럼프 대통령이 동남아시아연합(ASEAN) 정상회의 참석 차 동남아를 방문했을 때,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와 이런 조항이 들어간 상호 무역협정을 체결했습니다. 태국이나 베트남과의 향후 협상에도 같은 조항이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말레이시아 총리, 국회에서 "항복이 아니다"고 몇 번이나 변명하다
말레이시아의 아난와르 총리는 국회에서 이 협정에 대한 국내 비판에 직면해 "이것은 항복도 아니고, 배신도 아니고, 팔아먹는 것도 아니다"라고 거듭 변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협정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말레이시아가 엄청난 양보를 강요당했다는 것이 명확합니다.
농산물부터 화학제품까지 거의 모든 분야의 미국 제품에 관세를 인하하거나 철폐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보잉(Boeing) 항공기 구매까지 결정되어 버렸습니다. 독약 조항 없어도 이미 일방적인 내용이 아닙니까?
야당에선 "우리의 경제 주권과 정책 수립의 자유를 빼앗는 일방적인 내용"이라며 비판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전직 총리 마하티르까지 나서서 아난와르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수준까지 도달했습니다.
스위스의 국제경영개발연구소(IMD)의 사이먼 에베넷 교수는 이 조항을 "미중 대립을 배경으로 한 미국의 충성심 테스트"라고 지적했습니다. 즉, 미국이 협정에 '중국과 가까워지지 마'라는 협박을 숨겨놓은 것입니다.
의외로 일본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다
이 대목에서 일본의 얘기가 나옵니다. 일본이 미국과 7월에 체결한 무역합의에는 명시적인 독약 조항이 없습니다. 하지만 9월 발표된 미국 대통령령에는 "일본이 협정상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필요에 따라 본 명령을 수정할 수 있다"는 문구가 들어있습니다.
즉, 말레이시아나 캄보디아만큼 노골적이진 않지만, 일본도 같은 논리의 그물에 걸려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일본의 경우, 독약 조항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제한될 입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레이시아와 크게 다릅니다. 일본은 이미 미국 진영의 일부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2018년 USMCA──이 수법의 전례가 있다
사실 이런 전략은 새로운 게 아닙니다. 트럼프 1기 때인 2018년 체결된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에는 '비시장경제 국가'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 협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중국을 명시한 것이죠.
그 결과 캐나다는 중국과의 FTA 체결을 검토해오다가, USMCA 체결 이후로는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정교한 외교 수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남아의 '중립 외교'라는 명분이 무너지고 있다
여기서 이 기사의 핵심에 도달합니다. 동남아 국가들은 미국과도, 중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중립 외교'를 표방해왔습니다. ASEAN 지역의 최대 무역 상대국인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미국과의 안보 협력도 하는, 아슬아슬한 외교 줄타기를 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독약 조항은 이런 줄타기를 점점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중국과의 희토류 관련 산업 협력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미국과의 협정 때문에 족쇄가 채워졌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희토류 쟁탈전도 격화되고 있다
기사의 후반부를 보면 미중이 동남아에서 희토류(레어어스) 확보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세계 희토류 생산량의 약 70%는 중국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태국과 말레이시아와 희토류 개발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우선 공급을 약속받았습니다.
한편 중국은 미얀마 국경 지역에서 희토류 채굴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2022년부터 채굴 속도가 급격히 빨라져서, 2025년에는 16곳의 신규 개발이 계획 중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태국에선 환경오염 우려가 확산되고 있으며, 여러 강에서 유해 물질이 기준치를 초과 검출되었습니다. 이윤 추구와 환경 파괴의 딜레마가 동남아를 강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약 조항'은 동남아 국가들의 정책 자유를 빼앗는다
생각해보세요. 말레이시아나 태국의 지도자들은 이제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수시로 살펴야 합니다. 새로운 협정을 체결할 때마다 "이게 미국의 '중요한 이익'을 손상하진 않을까?"라고 고민해야 합니다.
정말 답답한 상황입니다. 경제 성장을 위해 원래라면 중국과의 협력도 고려해야 할 상황에서도, 독약 조항이 발목을 잡습니다. 이건 단순한 '무역협정'이라기보다 동남아 각국의 정책 결정 자체를 미국이 지배하기 위한 장치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더 재미있는 점은 미국과 트럼프 행정부가 '독약 조항'의 문구를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중요한 이익"이라는 표현은 정의되지 않았습니다. 즉, 미국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국가주권을 다루는 협정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개인적인 생각: 이 전략은 장기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개인 관찰이지만, 미국의 이 전략은 결국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동남아 국가들이 완전히 미국 진영에 편입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ASEAN 지역의 최대 무역 상대국입니다. 경제적으로 완전히 미국에 종속되면 역내 경제가 큰 타격을 입습니다. 그럼 말레이시아나 태국의 국내 정치는 대혼란에 빠지겠죠.
이미 말레이시아에선 여당 내에서도 독약 조항에 대한 반발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하티르 전 총리의 사임 요구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압력입니다.
결국 미국의 '독약 작전'이 정말 효과를 발휘할지는 동남아 각국이 미국에 얼마나 따를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현재로선 협정에 서명했지만, 그 이후가 진짜 문제입니다. 거기에야말로 동남아의 진정한 시련이 있을 겁니다.
독약 조항이라는 표면적인 계약서 문구 너머에는, 미국이 이 지역의 정치·경제적 자유도(degrees of freedom)를 얼마나 빼앗을 수 있는지에 대한 큰 그림이 숨어있습니다. 동남아의 정책결정자들은 앞으로 매 결정마다 워싱턴의 눈치를 살피는 신세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이 이번 협정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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