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평점 3.9점
여기가 아마도 예전에 있다가 리모델링을 다시 해서 개장한 것으로 보인다
어라?
원래 도쿄도의 목욕탕 요금은 중앙에서 관리하나.. ㅎ ㄷㄷ
번역이 잘못됐는데 2023년 7월부터의 요금은 아래와 같다고 되어있다.
520엔.. 정말 싸다..
한국은 거진 동네 목욕탕도 만원 아닌가
우연히 재밌는 글을 발견해서 일단 이거부터..
1. 사원의 시욕(호케지의 욕실)
6세기에 전래된 불교는 쇼토쿠 태자의 적극적인 도입 정책도 있어, 국가 종교로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불교에서는 목욕의 공덕을 설파하며, 더러움을 씻는 것은 불제자에게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온실교"라는 목욕의 공덕을 설파한 경문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목욕에 필요한 7가지 물품(연화, 정수, 조두, 소고, 순회, 양지, 내의)을 갖추면 7가지 병을 제거하고, 7가지 복을 얻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원에서는 7당 가람의 하나로 욕당을 세고, 시욕이 성행했습니다.
나라의 도다이사와 호케지에는 지금도 대욕장과 욕당이 남아 있어, 당시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가정에는 욕실이 없고, 마을 목욕탕도 없던 시대에 사원의 시욕은 종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서민들에게도 기쁜 시혜였습니다.
시욕을 통해 서민들이 목욕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요,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교토에 목욕탕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유야"가 등장합니다.
2.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의 목욕 대접(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나라 시대에 시작된 시욕의 습관은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서 가장 성행하게 됩니다.
특히 건구 3년(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고시라카와 법황의 추복을 위해 가마쿠라 산에서 행한 100일간의 시욕이나, 막부가 호조 마사코의 공양을 위해 행한 장기간의 시욕은 특히 유명하며, '아즈마카가미'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도, 막부와 사원에 의해 시욕의 습관은 이어졌습니다.
시욕은 "공덕 목욕" 등으로 불리며, 일정한 날을 정해 서민들에게 제공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시욕의 습관은 개인에게도 확산됩니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부인 히노 토미코는 매년 말에 부모의 추복을 위해 목욕을 베풀고, 친척들을 초대했습니다.
그 때 목욕과 식사를 대접한 것은 유명합니다.
이 무렵부터, 목욕탕이 있는 집에서는 사람을 초대해 목욕을 베풀고, 목욕 후에는 차와 술잔치를 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목욕 대접"으로, 서민 계층에서도 부유한 집은 이웃 사람들에게 목욕을 베풀거나, 지방에서도 마을의 약사당이나 관음당에 신자들이 모여 목욕을 하고, 목욕 후에는 가져온 술과 생선으로 연회를 여는 "목욕 강좌"가 행해졌습니다.
3. 에도 시대의 목욕(석류구의 입구)
에도에서 최초의 목욕탕은 '게이초 견문록'(1614년 발간)에 "덴쇼 19년(1591년) 이세 요이치라는 사람이 젠비바시(현재의 도키와바시 부근에 있던 다리) 근처에 목욕탕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들어온 다음 해로, 성하 마을도 정비되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그것이 게이초 연간 말기(17세기 초)에는 "마을마다 목욕탕이 있다"고 할 정도로 목욕탕이 널리 퍼졌습니다.
에도 최초의 목욕탕은 증기 목욕탕이었다고 생각되지만, 곧 증기 목욕탕의 일종인 "토장 목욕탕"이 등장했습니다.
욕조의 바닥에 무릎 정도까지 물을 채우고, 하반신을 담그고, 상반신은 증기로 찌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욕실의 출입구에 미닫이 문을 달아 증기가 새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개폐가 잦으면 증기가 빠져나가므로, 고안된 것이 "석류구"입니다.
이것은 세 면을 판자로 둘러싼 작은 방에 욕조를 놓고, 출입구에 천장에서 낮게 판자를 내려 증기가 새는 것을 막았습니다.
목욕객들은 이 판자를 굽혀 출입합니다.
석류구라고 부르게 된 것은 에도 시대 특유의 말장난입니다.
당시 거울을 닦는 데 석류 씨를 사용했기 때문에 "굽혀 들어가는"을 "거울을 닦는다"는 말로 바꾸어 "석류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현재와 같이 물을 가득 채운 "수에 목욕탕"이 생긴 것도 게이초 연간 말기입니다.
수에 목욕탕은 증기가 아닌 물 목욕탕이었기 때문에 "수이 목욕탕"이라고도 불리며, 일반 서민 가정에 널리 퍼졌습니다.
처음에는 물을 양동이에 넣는 방식이었지만, 나중에는 양동이 안에 철관을 넣고, 아래에서 불을 피우는 방법이 발명되었습니다.
이것을 "철포 목욕탕"이라고 하며, 에도에서 널리 퍼졌습니다.
한편, 양동이 바닥에 평가마를 달아 물을 끓이는 "고에몬 목욕탕"은 간사이에 많았던 것 같습니다.
4. 에도 서민의 사교장, 유녀 목욕과 2층 목욕탕(유녀 목욕의 모습)
에도 시대의 목욕탕은 아침부터 물을 끓여, 오후 6시경의 신호로 끝납니다.
목욕탕은 신분의 구별 없이, 벌거벗고 교제할 수 있는 서민의 휴식처였습니다.
곧 목욕탕에서 손님에게 차를 제공하는 서비스도 시작되어, 유녀들이 활약하게 됩니다.
이 유녀들은 낮에는 손님의 등을 씻어주지만, 저녁이 되면 샤미센을 들고 손님을 접대합니다.
이 유녀 목욕은 상인과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기가 높았던 것은 "탄젠 목욕탕"입니다.
호리 탄고노카미의 저택 앞에 있는 목욕탕에서 유래한 이름인데, 이곳의 "가츠야마"라는 유녀가 매우 인기가 있어, "탄젠의 물은 그때 모두가 취했다"는 센류로 읊어질 정도였습니다.
또한, 이곳에 모인 남자들의 풍속을 "탄젠풍"이라고 부르며, 가부키에도 등장했습니다.
이렇게 유녀 목욕탕은 번성했으며, 전성기에는 요시와라 유곽이 쇠퇴할 정도로 번성했다고 합니다.
한편, 막부는 풍속상의 이유로 여러 차례 금지령을 내렸지만, 거의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메이레키 3년(1657년), 막부는 유녀 목욕탕을 철저히 단속하여, 600명의 유녀를 강제로 요시와라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에도의 유녀 목욕탕은 폐지되었습니다.
그 후, 목욕탕은 에도 서민의 휴식처로 사랑받았습니다.
과거 유녀가 손님을 접대하던 2층의 넓은 방은 목욕객들에게 개방되어, 차를 마시거나 과자를 먹거나, 바둑과 장기를 즐기는 사교장으로 이용되었습니다.
5. 에도의 목욕탕은 혼욕(에도 시대의 석류구 내부)
에도의 목욕탕은 "입리코미유"라고 불리며, 남녀 혼욕이었습니다.
이는 에도 말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석류구 내부는 어두워 풍속을 어지럽히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며, 몇 차례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잘 개선되지 않아, 텐포 개혁(1841~43) 때 엄격히 단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욕조의 중앙에 칸막이를 설치하거나, 남녀의 목욕 시간을 나누거나, 남탕과 여탕만 있는 목욕탕도 생겼습니다.
시대가 바뀌어 메이지 시대가 되자, 메이지 정부는 막부 이래의 구습으로서 남녀 혼욕을 특히 엄격히 금지하고, 여러 차례 통지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오랜 습관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혼욕이 사라진 것은 메이지 중반이었습니다.
6. "석류구"에서 "개량 목욕"으로(메이지 시대의 목욕탕 모습)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목욕탕의 양식은 일변했습니다.
석류구는 제거되고, 지붕에 증기 배출구가 만들어지거나, 욕조와 바닥을 평평하게 하거나, 세면장도 훨씬 넓어졌습니다.
이것은 "개량 목욕"이라고 불리며, 평판을 얻었습니다.
후에는 욕조의 가장자리를 조금 높여, 더러움이 들어가지 않도록 고안되었습니다.
다이쇼 시대가 되면 목욕탕은 더욱 현대화되어, 나무로 된 세면장과 욕조는 사라지고, 타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쇼와 2년(1927년)에는 욕실의 물과 온수에 수도식 카란이 설치되어, 위생면도 향상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설비와 서비스에도 다양한 취향이 반영되어, 사우나를 설치하거나, 기포 목욕을 하거나, 스포츠 설비를 갖추는 등 독특한 설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편, 가정에서의 목욕법을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도 많으며, 온천 여행도 성행하고 있습니다.
일본인은 단순히 청결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목욕에 "플러스 알파"를 추구하는, 본래 목욕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잡설이 너무 길었다..
이치가야야나기초의 야나기유 라고 적혀있다
여기는 우시고메 야나기역 바로 옆에 위치해있다
새로 인테리어를 해서 외관은 정말 깔끔하다
요금은 앞서 적힌대로 동일하게 성인은 520엔, 6세 미만은 100엔이다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 구글 포토로 대체
아주 작은 휴게공간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이런식으로 되어있다
사물함은 꽤 넉넉하게 있는데 은근히 공간이 넓지는 않다
그리고 100엔짜리가 필요해서 돈 넣고 키를 뽑고 나올때 다시 100엔이 나오는 구조다
100엔짜리가 없으면 옷 보관도 쉽지 않다 ㅎ
사진은 없지만 실내의 샤워할 수 있는 공간이 한 4줄 5줄 정도 있다
일본센토 답게 쪼그려 앉아서 하는게 기본이고 서서 샤워할 수 있는 공간도 두어개 있다
그리고 문제는 탕인데..
이게 탕의 전부다..
어느정도 크기냐면..
저 하나의 공간에 한명 들어갈수 있는 정도라서..
기껏해봐야 여섯명 정도 들어가면 정말 너무 좁다..
오히려 눈치봐가면서 오래 있기도 어려운 구조다
다행히 내가 갔을때는 밀도가 그리 높지 않아서 얼추 코도모와 즐길수 있긴 했지만
탕이 매우 좁다는것을 알고 가야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이 너무 뜨겁다..
거의 43도 정도로 세팅이 되어있는거 같은데
추측되는 사유로는 노인들이 뜨거운 물을 좋아한다고 하니 노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니까 높을 수도 있고
애초에 탕이 좁으니까 미지근하게 하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잇을 수 있으니 뜨겁게해서 순환율을 높히려는 의도도 있을 것 같다
냉탕도 성인 두명이 아주 비좁게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정도의 사이즈가 있다
여러모로 탕 사이즈가 좀 아쉬운 곳이다
코도모와 즐길만한 곳이 많이 없어서 말 그대로 목욕하고 탕에 잠시 들어갓다가 나올 정도만 가능한데
사모님께 여쭈어보니까 일단 깨끗하고 새거라서 맘에 든다고 하셧다
그러고보니 깔끔한 맛은 있다
그래서 뭐 이동네 센토 중에서는 가장 낫지 않나 싶다
그나마 이 바닥에서는 유명한 곳이 벤텐유인데..
여기는 넓긴해도 너무 낡고 바글거려서 그게 좀 별로였는데
여기보다는 깔끔한 맛으로 좋은 선택지가 될 것 같다